신주쿠 목욕탕의 역사|에도 시대부터 현대까지의 변화와, 온탕이 도시를 이어주는 이유

기원: 사찰의 욕당·시욕에서 공동 목욕 문화로

목욕탕의 기원은 사찰에 마련된 ‘욕당(よくどう)’과 서민에게 개방된 ‘시욕(施浴)’에서 비롯됩니다.
나라 시대부터 헤이안기에 걸쳐 승려의 수행 및 자비 행위로 목욕이 이루어졌으며, 이후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일반 서민에게도 확산되었습니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 마을 단위로 ‘유야(湯屋)’라 불리는 공동 목욕 시설이 등장하고, 목욕은 일상의 생활 습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당시 화재가 잦았던 목조 주택에서는 가정 내에 욕실을 갖추기 어려웠기 때문에, 유야는 위생·방화 측면에서도 합리적인 시설이었습니다.
유야는 ‘몸을 깨끗이 하는 장소’이자, 세상 이야기를 나누고 정보를 교환하는 사교의 장이기도 하여, 일찍부터 ‘목욕 = 생활의 허브’ 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신주쿠의 목욕탕: 전후 복구 ~ 고도 성장기의 절정

전후 주택 부족과 인구 집중으로 인해, 도쿄 각 지역에는 도보권마다 목욕탕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신주쿠도 예외가 아니어서, 목조건 아파트나 장옥에 사는 사람들에게 목욕탕은 ‘동네의 거실’ 역할을 했습니다.

고도 경제성장기(1960년대)에는 도쿄의 공중목욕탕 수가 정점에 달해, 쇼와 43년(1968년)에는 약 2,700곳에 이르렀습니다.
신사 건축 양식의 외관, 후지산 페인트 벽화, 큰 굴뚝 등은 많은 목욕탕에서 채용되어 지역마다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1. 감소의 시대: 가정 욕실의 보급과 도시 재정비

1970년대 이후 가정용 욕실이 표준 설비가 되면서 목욕탕 수는 서서히 감소했습니다.
주거 설비의 향상, 연료비 상승, 건물 노후화, 토지 재개발 등이 겹치며 장기적인 감소 경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집에 욕실이 있어도 목욕탕에 간다’라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 생겨나며, 목욕탕의 역할은 ‘필수’에서 ‘선호’ 로 변화했습니다.


  1. 현재: 소수 정예 네트워크와 이용 동기의 변화

현재의 신주쿠에서는 수는 줄었지만, 목욕탕은 지역의 소규모 거점으로 여전히 숨 쉬고 있습니다.

영업시간·요금·어메니티를 알기 쉽게 발신하고, 다국어 표기나 손님이 아무 준비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세트 등, 초보자도 이용하기 쉬운 환경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보일러·배관의 갱신, 탈의실의 밝기와 동선 개선, 배리어프리 개수 등, 쾌적성과 지속 가능성을 겸비하려는 노력도 보입니다.

또한 관광객과 외국인 이용자도 증가하며, ‘도시와 세계를 연결하는 따뜻한 장소’라는 새로운 역할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1. 신주쿠다움: 다층적인 도시의 ‘온도 차’를 잇는 장소

오피스·주거·음식·관광·나이트라이프가 혼재하는 신주쿠에서는 목욕탕이 심신을 리셋하는 스폿으로 기능합니다.

짧은 시간에 피로를 풀고, 일·학업 사이에 리프레시하는 장소, 밤 일정 전후에 기분을 정리하는 장소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입니다.
세대·국적을 넘어 ‘알몸으로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은 도시의 익명성을 완화하고, 부드러운 연대감을 키우는 장소가 됩니다.


  1. 앞으로: 계승과 업그레이드의 공존

전통적인 신사 건축 양식과 페인트 벽화는 지역의 문화 자산으로서 계승해야 할 개성입니다.
동시에 환경 부담 감소, 캐시리스 결제, 사우나·라운지 강화 등 시대에 맞춘 업그레이드도 요구되고 있습니다.

목욕탕이 지역과 협력하며, 어린이·고령자·관광객 모두가 안심하고 방문할 수 있는 안내와 규칙을 정비함으로써,
앞으로도 목욕탕은 ‘동네의 거실’ 로서 살아남아 갈 것입니다.